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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여의도성모병원은 1930년 9월6일 이듬해인 "조선교구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던 중 최초로 설립이 논의되어 1953년 3월 11일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에서 당시 경성부 영락정 1정목 39번지(현 중구 저동 1가 38번지) 소재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무라가미병원을 매입, 그 해 4월 18일 병원설립허가를 받고 1년가 수리 개조 한 후 1936년 5월 1일 라리보(Larribea) 주교의 병원 강복식을 거쳐 5월 11일 역사적인 성모병원의 개원을 보게 되었다.

개원 당시의 병원규모는 대지 538평, 건평 335평에 입원실 24병상(전염병실 포함)과 외래 및 악국, 검사실 등이 설치된 크지 않은 규모였으며, 특히 2층에는 가톨릭 의료기관의 특성으로 오늘의 원목실과 유사한 경당(敬堂)을 설치하였다.

의료진은 의사4명(박병래, 윤건희, 마훙룡, 이흥배)과 일본인 약제사 1명, 간호부 10명(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 9명 포함)등 총 15명이었고 주 진료과목은 내과와 소아과였으며 초대 병원장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인 이토오 내과 소속의 대학강사였던 박병래 박사가 취임하였다. “성모병원”의 명칭은 당시 경성교구장이며 이사장인 라리보 주교가 해성(海星)으로 제의하였으나 박병래 원장이 성모(聖母)로 제안하고 경향잡지사 사장이던 윤형중 신부의 동의로 1935년 7월 3일 공식적인 명칭으로 결정되었다. 성모병원이 개원한 1936년 이전까지의 가톨릭계 의료기관이 전국적으로 10여 곳의 시약소외에 의원급 5곳에 불과하였던 것을 감안할 때 성모병원의 개원은 한국 가톨릭 최초의 정식병원 개원이라 볼 수 있겠다.

개원 원년인 1936년의 1일 평균 내원 환자수는 15명이었으나 불과 1년 후인 1937년에는 60명으로 급증하여 당시 여의도성모병원의 높은 신뢰도를 반증하고 있으며, 여의도성모병원은 보다 양질의 진료를 위해 1937년 2,000원을 들여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가 장비였던 울트라 테름(超短波器)을 구입하였고 병원전체를 신축 확장하려고 계획하기도 하였다.

또한 여의도성모병원에서는 개원 초부터 많은 불쌍한 환자들을 돌보아 오던 중 1940년경부터는 본격적인 자선 진료를 시작(그 당시 시료병동이라 호칭함) 하였으며, 1946년 9월 23일 당시 저동 2가 1번지 소재의 적산사립병원인 사또병원을 인수하여 주로 자선진료와 장기환자를 도와주었다. 1964년에는 산재병원옆에 대지 318평, 건평 324평에 지하 1층, 지상 4층, 32병상 규모의 자선진료소를 신축, 나병연구소와 외래진료소를 운영하였으며, 1966년경 제2부속 성요셉병원으로 이전하여 자선진료를 계속하던 중 여의도성모병원의 여의도 이전과 동시에 CMC자선진료부로 개편되어 여의도성모병원 및 강남성모 병원에 자선진료 병상을 배정 운영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자선진료를 위한 단독건물은 없어졌다. 1942년에는 당시 원정 4정목 1번지에 위치한 예수성심신학교를 일본군이 막사로 징발하려는 획책이 일어나자 경성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교구평의회를 열어 학생들을 함경도 원산의 덕원신학교로 이적 시키고 학교건물에는 여의도성모병원 분원을 개설키로 결정하였고 1943년 봄 1년간의 공사후 1944년 4월 대지 1,295평, 건평 429평에 병실수 18, 병상수 35 규모의 분원을 완공하였으며, 1944년 4월 29일 노기남 주교의 강복식 후 5월 개원 하였다. 분원은 의사 1명(권의정-부원장의 자격), 수녀 6명, 간호사 6명 등 모두 11명의 의료진이 내과, 소아과를 위주로 진료하였고 1일 평균 재원환자 수는 30명, 외래환자수는 50명 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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